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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1624 네덜란드 식민지
- 1662 정씨 왕조 시기
- 1683 청조 시기
- 1895 일본 식민지 시기
- 1945 중화민국 시기
- 1919 쑨원
- 1950-1975 장제스 (蔣中正) -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 1975-1978 옌자간
- 1978-1988 장징궈 (蔣經國) - 통일
- 1988-2000 리덩후이 (李登輝) - 독립
- 2000-2008 천수이볜 (陳水扁) - 급진 독립, 일변일국(一邊一國)론
- 2008-2012 마잉주 (馬英九) - 중립, 후손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 주장
일본의 통치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청나라는 일본이나 구미 열강의 대외 진출에 대한 국방상의 관점에서 대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1885년에 대만을 푸젠 성에서 분리해 타이완 성을 설립했다. 하지만, 1894년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의 영토로 인정하고, 대만성이 폐지되었다. 대만에서는 일본의 대만 점령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나 대만 민주국이 건국되었지만, 일본군에 강력한 진압때문에 저항 운동은 사그러들었다. 그후, 일본 정부는 대만총독부를 설립해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대만을 통치하였다.
"너무나도 평온했던 타이완 시대의 종언은 일본인과 타이완인 양쪽 모두에게 뒤틀린 감정을 배태했다. 패전 사태에 직면하고서도 타이완에 머무르고자 했던 재주 타이완 일본인을 귀환으로 내몰았던 것은 신체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 아니라 경제적 곤궁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패전 후에도 혜택 받은 존재였다고 자각한 것은 일본으로 귀환한 후에 만주 귀환자들이 겪었던 가혹한 체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은 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은 타이완 주민에 대한 친근감으로 쉽게 연결되었다. 확실히 패전 후에도 일본인과 타이완인의 관계는 심각한 대립으로 치닫지 않았으며, 패전 전과 변함없는 인간관계를 유지했다는 사례가 아주 많다. 또 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인과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일본인은 타이완인의 친일감정이나 일본 통치의 성공, 더 나아가서는 장제스가 8월 15일 라디오로 방송한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는 '이덕보원' 연설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본성인' 대 '외성인'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타이완인의 비극에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다.
한편 타이완인들 사이에서는 동포라고 믿었던 대륙의 중국인에 대한 환멸이 확산된 것과 반비례해서 일본인에 대한 친근감은 오히려 높아졌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타이완 주민들로서는 일본 통치 하에서도 중화민국 하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배구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통치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지배였으며, 타이완 주민들이 추구해온 자치는 마지막까지 인정되지 않았다.
타이완인들 사이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개가 가고 나니 돼지가 왔다' (젓가락을 들고 내려놓는 것까지 짖어대는 개처럼 시끄럽게 감시하는 일본인이 가고 나니, 이번에는 돼지처럼 무엇이든 탐내는 중국인이 왔다.)는 말은, 광복이라는 미명 하에 숨겨진 타이완인의 실망과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타이완 주민들에게 8월 15일은 '광복'이 아니라 제국신민으로서의 '항복'이었던 것이다."
양안문제
중공군에게 온전히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해,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의 병력이나 국가, 개인의 재산등을 속속 대만에 옮기기 시작해, 12월에는 중앙 정부 기구도 대만으로 이전해 타이베이 시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이러한 중화민국 정부의 움직임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당초 대만으로 군사적 침공을 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었지만,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병력이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1955년에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수 차례 미국에 중국 대륙 공격을 제안했지만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집권 이후 중화민국은 사실상 무력에 의한 대륙 수복을 포기하고, 대륙과의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로 통일 정책을 변경하였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대만과 중국은 각각 별개의 국가라는 '일국일변론(一國一邊論)'을 내세워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폐기하였다. 급진 대만 독립 성향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집권 이래로 대만 독립 문제가 주요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2008년에 취임한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지만 통일과 독립 중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2·28 사태
2·28 사태 또는 2·28 사건은 1947년 2월 28일 국민당 정부의 강압적 지배에 대항하여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국공내전에 패퇴한 국민당정부는 1949년 12월 타이베이로 옮겼다. 그러나,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 1일 전 섬에 걸쳐 총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포하였다.그 해 말부터 위험분자로 간주된 이들을 대량 체포했다. 대만을 보위하고 대륙을 공격한다(反攻大陸)는 총 구호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회담을 주장하며, 또는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는 주장이나 언론은 무조건 공산당 간첩, 파괴분자, 음모분자로 간주되었다.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91년 이등휘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은 「2·28 사건 연구 보고」를 발표했다. 이 조사로 2·28 사건의 진상규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사건으로 희생된 사망자의 수는 대략 3만여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정치
대만 주민은 크게 4개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계 원주민(原住民, 약 1.7%),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주로 중국(中國) 푸젠 성(福建省) 및 광둥 성(廣東省)으로부터 이주한 한족계 본성인(漢族系本省人, 약 85.3%),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중국 각지로부터 이주한 외성인(外省人, 약 13%)이다. 한족계 본성인은 복노인(福佬人, 약 73.3%)과 객가인(客家人, 약12%) 등으로 더욱 세분화된다. 1945년 국민당정권이 타이완섬으로 피신한 이후, 정권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본성인들을 억압하면서 이에 반발한 2.28 사태 등의 저항이 일어났다.(40년간 국민당정권이 계속되면서 정치,경제 등의 모든 부분에서 아직도 외성인 출신들과 그 후손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장제스와 장징궈 시대에는 대륙 수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본토 수복을 하지 못하고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천수이볜 총통 시대에는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세력이 늘었으나 마잉주 총통 시대에는 대륙수복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민주진보당은 2000년 이후 8년 동안 천수이벤 총통이 이끄는 대만 집권 여당이었다. 하지만 2008년 1월 타이완 총선에서 국민당이 정계에서 압승(전체 의석 113석중 81석 차지)하면서 정치적 패배의 쓴맛을 보았는데, 그 이유는 경제정책 실패(경제성장 둔화, 물가 급등, 실업률 상승)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 때문으로 분석된다.
국제무대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증대되면서 대륙 수복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중화민국의 정치 무대는 대륙 수복을 추구하는 세력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양분된 상태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현재에는 중국 본토 출신인 중국국민당 소속 마잉주(馬英九: 마영구) 총통의 당선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가 많이 좋아지고 있으며, 대륙 수복을 추구하는 세력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하지만, 반대파에 대한 강경한 정책으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외교
한국
본래 과거에 중화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뒷처리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고, 냉전시기에는 비슷하게 공산당에 의해 국토일부가 점령당한 분단국가가 되어 반공동지로서 유대감을 가졌기 때문에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화교는 출신상으로는 산동성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나, 거의 다가 대만국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1991년에 중국과 수교를 하게 되면서 중국측에서 대만과의 단교 조건을 내걸었고, 대만과의 국교는 단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측이 내건 조건은 한국한정이 아닐 뿐더러 받아들인 것도 여러나라이다. 오히려 온갖 핑계를 대며 대사관의 철수를 늦춰주어 외교관의 편의를 최대한 반영해주었고 귀국비행기편도 별도로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걸 괜히 질질 끈거로 생각 한 것인지 일방적으로 한국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북한-남한, 중국-대만의 상황에 약간의 동질성을 느낀게 있었던 것도 작용했다.
대만이 갑자기 혐한으로 돌아가자 과거 수교국에 대한 최대한 예우로 명동의 대만대사관을 철거한 뒤 해당 지역은 공지로 영구히 처리하려 한 원계획을 취소하고 명동의 대만 대사관을 중국대사관으로 줘버렸다. 중고품 대사관을 받아든 중국쪽 외교단은 되려 정통성(대만이 가진 정치적 위치를 중국이 대신한다)을 인정받았다며 좋아했다. 거꾸로 대만쪽은 이 일을 비난하면서 더 깊은 골이 생긴다.
일본
일본과 중화민국은 예전에는 적국이었지만, 반공의 입장을 취하는 서방 진영에 소속되었다. 안보에 있어서는 중화민국은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배경으로 미군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미일 동맹을 가진 일본과 간접적인 협력 관계에 있다. 일본과 중화민국은 서로 센카쿠 열도(일본이 점령하고 있음)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종종 분쟁이 발생했지만 심각한 충돌에 접어 들지는 않았다. 민진당이 보다 일본에 대하여 우호적이다.
묘하게 일본과 사이가 좋다. 같은 섬나라라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일본하고 사이가 좋은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댓가로 대만을 할양받게 되어, 1945년까지 통치하였는데, 그 기간이 한국보다 길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했으며, 더불어 해방 이후 들어온 국민당 정권의 반체제적 지식인(이들은 바로 중일전쟁 시기에 육성된 인재들이었다)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 덕에, 상대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또한 조선에 비해서 일본의 대만 통치는 전세계 식민지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만큼 매우 성공적이었던 건 사실. 우선 청나라의 대만통치 자체도 만주족에 의한 식민지배와도 같았으니 일반인의 입장에선 위에놈들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선과 다르게 고토 심페이 등 유능한 민간인 총독이 자주와서 대만을 통치했었고, 사탕수수재배를 바탕으로 식민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100% 자립도와 대만인들에게 상당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게 한 건 사실이다. 일본의 정치나 문화적인 억압은 조선에 비해서 많이 부드러웠고, 그 탄압은 해방 이후에 들어온 국민당 정권의 탄압에 비하면 별게 아니었다고 받아들여져서 상대적으로 친일본정서가 많게 된 것. 당시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대만인들은 당근으로 회유하는게 가능하다면 조선인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했다. (아, 물론 초기에는 일본 식민 지배에 많이 저항했었다. 대나무 숲에서 게릴라전을 벌인다던지 하면서.)
이런 경향에 따라 서울대학교가 경성제국대학을 전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국립타이완대학이 타이베이제국대학을 전신으로 인정하는 등의 차이를 보인다. 참고로 일본 본토가 아닌 곳에 세워진 제국대학은 저 두 곳이 유이하다.
사실 오덕문화 한정으로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2007년 여름에는 리덩후이 전 총통이 무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제대로 일빠인증 당해버렸다. 대충 대만에서 친일파는 반중국세력인 민진당 지지자들이 많다. 대만독립을 꿈꾸는 그들에게는 국민당과 중국을 싫어하고 섬나라인 대만이 독립해서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중국과의 통합이나 아니면 1국가 2체제를 주장하는 국민당을 지지하는 쪽은 상대적으로 반일정서가 그래도 좀 남아있는 편.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자체가 일본의 중국침략을 몸소 겪고서 대륙에서 1949년 이후에 넘어온 사람들이기에 반일정서가 남아있다.
문화
타이완은 중화권에 속한 지역으로, 타이완의 대중 문화는 중화권과 맥을 같이 한다. 타이완 출신의 연예인들은 중국 대륙과 세계 각지의 화교 사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외국 문화 중에서는 일본의 대중 문화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타이완의 대중 문화 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타이완에서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 중에는 일본의 만화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 많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