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1995/3/20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 옴 진리교
잃어버린 10년
- 1985/9/22 플라자 합의
-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G5 경제선진국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를 가리킨다. 합의에서는 달러화의 가치를 내리고 엔화의 가치를 높이는 정책이 채택되었다. 발표일 다음날에 달러화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약 20엔이 하락하였다. 1년 후에는 달러의 가치가 거의 반이나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태까지 되었다.
- 일본에서는 급속한 엔고 현상이 진행되어 엔고에 의한 불황의 발생이 우려되어 저금리 정책의 시행이 계속되었다. 이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이나 주식에로의 투기를 가속화하여 거품 경제 가열을 초래하였다.
- 그 후에 지나쳤던 달러화 하락 현상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하여 환율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하여 1987년 다시금 각국이 협조하기로 하는 루브르 합의가 이루어졌다.
- 록히드 사건
- 리쿠르트 사건
- 안보투쟁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다음 행동(원폭투하와 대일참전)을 정당화할 구실을 엿보고 있던 미국과 소련에게 일본의 행동이나 발언 내용은 사실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일본은 미일개전 당시에도 외교적 미숙으로 '속임수 도발'이라는 철호의 공격소재를 미국에 안겨주고 말았지만, 전쟁종결 과정에서도 포츠담선언에 대한 애매한 대응으로 미국과 소련에게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절호의 구실을 제공했던 것이다. - 대일본제국 붕괴, 가토 기요후미
한반도의 8월 15일, 즉 일본의 패전과 식민지 지배의 종언은 조선총독부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9일이다. 그러나 이날은 일본의 조선 지배의 마지막 날이기는 하지만, 조선 해방의 날은 아니었다. 일본을 대신한 미국의 지배가 시작된 날일 뿐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이승만은 구 조선총독부의 발코니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소리 높여 선언했다. (...) 8월 15일 이후 자신들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9월 9일은 굴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3년 전에 이룩하지 못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설사 허구였다 할지라도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8월 15일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의 건국기념일은 9월 9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북한 쪽이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45년 9월 9일 평양에서는 무언가 상기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8도선 이북의 시정권은 소련군이 진주한 장소에 따라 단계적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날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붕괴 후 한반도에 출현한 두 개의 국가는 자력이 아니라 미소 양국의 구상에 따라 수립되었다. 그러나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자타가 공히 인정하도록 하려면 두 국가 모두,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35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의 굴욕을 떨쳐버렸어야만 했다. 즉 남한도 북한도 탄생하면서 '건국의 신화'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 대일본제국 붕괴, 가토 기요후미
- 이시와라 간지
- 그리하여 1931년 일본의 남만주 철도회사에 의해 건설된 철도가 폭파되자(이것은 이시와라와 이타가키 세이지로가 꾸민 자작극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화로 삼아 본국정부나 육군, 심지어는 관동군 상부의 허가조차 받지 않고,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시와라는 이때 눈부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약 1만여명의 병력으로 23만명의 장쉐량의 중국 동북군 병력을 무력화시키고 만주전역을 일본군의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독단 행위는 국제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우익 청년 장교들의 우상이 되었고, 처벌을 받기는커녕 승진하여 센다이 주둔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 1937년 3월 이시와라는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지론인 소련과 전쟁에 방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반대했다. 특히 그는 전선을 확대시키려는 부하들의 발호를 막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각하께서 (만주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섞인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시와라의 확전 불가론은 육군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그는 중앙 요직으로부터 해임되어 관동군의 부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고, 지배자의 지위만을 향유하는 관동군의 지휘부를 비판하였고, 관동군 장교들의 월급을 삭감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동군의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와 마찰을 빚어 해임당하고 교토 근처의 마이즈루에 있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 그는 일본에 돌아와서도 동아연맹을 위한 강연과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위해 중국과 전쟁을 반대했다. 1939년 그는 중장에 임명되었고 제16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앙숙인 도조 히데키가 승승장구하여 수상까지 오른 반면, 이시와라는 도조를 "국가의 적"이라고 공개 비난하여 군에서 강제로 예편당했다. 그는 도조가 남방자원 확보를 위해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여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자, "기름때문에 전쟁을 시작하는 놈도 있나"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의 민간인들의 군사 지식이 박약하다고 생각하여, 리쓰메이칸 대학의 교수에 초빙되어 2년간 민간인 학생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위험분자라고 생각했던 도조의 명을 받은 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하여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