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생활사"로 제목을 바꾸어야 할 듯
Contents |
단어
- 망개나무 열매 사진출처
- 까마중 열매 사진출처
- 뽑기, 달고나 사진출처
- 다슬기 사진출처
- 선데이 서울 사진출처
- 대폿잔 사진출처
- 기생 : 잡지 <장한長恨>, 권번, 화류병, 곤도-무(콘돔)
- 음식 : 아지노모도, 쪼꼬레-트, 카라멜, 껌, 쥬시 후루도, 스피야민도, 피케, 건빵, 꿀보다 더 단 진고개 사탕, 모찌떡, 밤과자, 센베이, 요깡(양갱), 카스테라, 삼덕당, 현미빵,
- 영화 :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황금관, 대정관, 변사, 서상호
- 자동차 : 포드, 목탄차, 카바이트(아세틸렌)차
- 라디오 : 경성방송국, 제오디케JODK
- 비누, 창포, 세탁비누, 양잿물 세탁, 가루치약, 치마분齒磨粉, 라이온 치마, 박가분, 동동구리무, 연독鉛毒, 무연無鉛, 백색미안수白色美顔水
- 백화점 : 미쓰코시, 오복점, 화신백화점, 박흥식,
- 맥주 : 삿보로 맥주, 기린 맥주, 가탁주, 막걸리, 소주, 청주, 약주, 개성소주, 동아소주
- 커피 : 양탕국, 끽다점, 청목당, 손탁호텔, 낙랑파라, 프라타느, 에리사, 프린스, 밀림, 시인 이상, 씩스나인, 제비, 쓰루, 맥麥, 1898년 8월 18일 고종 커피 독살시도, 가비다加比茶, 부래상
- 전당포, 단발령, 모단毛斷걸, 히사시가미
- 어깨허리, 졸잇말, 양산, 물감, 몸빼, 고무신, 대륙고무
- 양귀비 > 아편 > 헤로인
인용
태평천하
그러나 그 돈장이란 말이 윤직원 영감한테는 저 히틀러라든지 하는 덕국 파락호破落戶[1]의 폭탄 선언이라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말입니다.
이완李浣이 대장으로 치면, 군산群山을 죄꼼은 깎고, 계수를 몇 가지 벤 만큼이나 하다 할는지요. 윤직원 영감은 그래서 바로 머리맡 연상硯床 위에 삼구三球짜리 라디오 한 세트를 매두고, 그걸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해 오는 남도 소리며, 음률 가사 같은 것을 듣고는 합니다. (중략) 물론 투정이요, 실상인즉 혼자 속으로는, 그놈의 것 돈 십칠 원 들여서 사놓고 한 달에 일 원씩 내면서 그 재미를 다 보니, 미상불 헐키는 헐타고 은근히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대복이가 윤직원 영감의 머리맡 연상硯床에 놓은 세트의 스위치를 누르는 대로 JODK의 풍류風流가 마침 기다렸던 듯 좌악 흘러 나옵니다.
어제 오후 부민관의 명창 대회에 가던 때처럼, 탕건 받쳐 통영갓에, 윤이 치르르 흐르는 안팎 모시 진솔것에 하얀 큰 버섯에다가 운두 새까마니 간드러진 가죽신에, 은으로 개대가리를 한 개화장에, 합죽선에 이렇게 차리고 처억 나섭니다. (중략) 사람마다 모두들 윤직원 영감을 한 번씩 짯짯히 보면서 지나갑니다. 더구나 때묻은 무명 고의적삼에 지게를 짊어지고, 붉은 다리를 추어 올린 요보[2]가 아니면, 뒷짐 지고 흰 두루마기에, 어둔 얼굴에 힘없이 벌린 입에, 어릿거리는 눈으로 가게를 끼웃끼웃, 가만히 들어와서는 물건마다 한참씩 뒤적뒤적하다가 슬며시 나가 버리는 센징들만이 조선 사람인 줄 알기를 십상으로 하던 본정통 주민들은, 시방 이 윤직원 영감의 진고개 좁은 골목이 뿌드읏하게시리 우람스런 몸집이며, 위의 있고 점잖은 얼굴이며 신선 같은 차림새하며가 풍기는 '얌반상'의 위풍에, 그만 압기라도 되는 듯 제각기 눈을 흡뜨고서 하 입을 벌립니다.
머리를 늘쩡늘쩡 땋아 내려, 자주 댕기를 드린 머리채가 방둥이에서 유난히 치렁치렁합니다. 그러나 이 머리는 알고 보면 중동을 몽땅 자른 단발머리에다가 다래를 들인 거랍니다. 앞머리는 좀 자르기도 하고 지져서 오그려 붙이기도 하고 군데군데 핀을 꽂았습니다. 빨아서 분홍물을 들인 흘게 빠진 생수 깨끼적삼에, 헐쑹덜쑹한 주릿대 치마를 휘걷어, 넥타이로 질근 동인 게 또한 제격입니다. (중략) 이만하면 어디다가 내놓아도, 대광교 천변가로 숱해 많이 지나다니는 그런 모습의 동기童妓지 갈데없습니다.
"오 전씩인데 비싸요!" / "타는 차값 말이간디? 그놈 사올 떄 값 말이지……" / 윤직원 영감은 재동 네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춘심이와 같이 버스를 기다립니다. 때가 아침 저녁의 러시아워도 아닌데 웬일인지 만원 된 차가 두 대나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더니 세 대째만에, 그것도 여간 붐비지 않는 걸, 둘이 떼밀고 올라 타니까 버스 걸이 마구 울상을 합니다.
사변中日戰爭은 국지 해결이 와해가 되고 북지사변으로버투 전단이 차차 중남미로 퍼지면서 지나사변에로 확대가 되어가고, 그에 따라 신문의 호외도 잦은 판입니다. (중략) "아니 글씨, 좋게 호떡 장수나 히여먹구, 인죄견 장수나 히여 먹을 일이지, 어디라고 글씨 덤비냔 말이여!" (중략) "네에…… 그것도 달리 그랬으꼬마는, 아라사가 쏘삭쏘삭해서. 지나의 장개석일 충동일 시켰대요. 이애 너 일본하고 싸움 않니? 아니해? 이 병신 바보 녀석아, 그래 그렇게 꿈쩍 못해?" (중략) "오옳지, 아라사가 그랬다! ……그런디 아라사가 왜? 저 거시기 그때 일아전쟁日俄戰爭에 진 그 원혐으로?" "아니지요. 그런 게 아니구, 아라사가 지나를 집어삼킬 뱃심으로 그랬지요!"
그러나 대복이에게 매삭 든다는 것이란 게 극히 적고도 겸하여 일정한 것이어서, 담배 단풍표 서른 곽과(만약 큰달일라치면 삼십일일 날 하루는 모아 둔 꽁초를 피웁니다) 박박 깎는 이발삯 이십오 전과, 목간삯 칠 전과 이런 것이 경상비요, 임시비로는 가장 하길의 피복대와 십 전 미만의 통신비가 있을 따름입니다.
"피. 그게 무어 비싼가? ……저기 본정 가믄 칠 원 오십 전이믄 빠알간 루비 박은 거 사는데…… 십팔금으로 가느다랗게 맨든 거……" (중략) "그럼, 내일 진고개 데리구 가서 반지 사주께, 그 담버텀은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골몰한 궁리란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모로코>의 재상연이 있고, 또 중일전쟁의 뉴스 영화가 좋은 게 오고 해서 꼭 구경은 가야만 하겠는데, 정작 군자금이 한푼도 없이 일왈 누구를, 이왈 어떻게 엎어 삶았으면 돈을 좀 발라낼 수가 있을까, 이 궁리를 하던 것입니다.
공자님은 가죽 책가위가 세 벌이나 해지도록 책 한 권을 가지고 오래 읽었다더니만, 서울아씨는 추월색 한 권을 무려 천독千讀은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아직 놓지를 않는 터이니까 앞으로 만 독을 할 작정인지 십만 독, 백만 독을 할 작정인지 아마도 무작정이기 쉽습니다. (중략) 그러니 그게 천하 명작의 시집도 아니요 성격책이나 논어 맹자나 육법 전서도 아닌 걸, 글쎄 어쩌자고 그리 야속스럽게 파고들고, 잡고 늘고 할까마는, 실상인즉 서울아씨는 추월색이라는 이야기책 그것 한 권을 죄다 외우는 만큼, 술술 읽기가 수나롭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취하는 점이 없습니다.
"그땐 말끔 은근짜[3]들뿐이지만, 시방은 이 사람들아 오는 기집들이 모두 상당허네! ……여학생을 주문하면 꼭꼭 여학생을 대령시키고, 과불 찾으면 과불 내놓구, 남의 첩, 옘집 여편네, 빠쓰껄, 여배우, 백화점 기집애 머어 무어든지 처억 척 잡아오지!" (중략) 연전에 관훈동에 있는 어떤 뚜쟁이의 구혈을 경찰서에서 엄습한 일이 있었습니다. 연루자가 수십 명 잡혔는데, 차차 취조를 해들어 가니까, 그 조직이 맹랑할 뿐 아니라, 이름은 세계사업사라고 지은 데는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별 의미는 없고, 아마 취체를 기이느라고 그런 엉뚱한 명칭를 붙였던 것이겠지요. 아무튼 그때부터 뚜쟁이집을 어디고 세계사업사라고 불렀고, 시방은 한 개의 공공연한 은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 먹고 가요?" / "난찌? 난찌란 또 무어다냐." / "난찌라고, 서양 즘심 말이에요." / "서양 즘심?" (중략) "아, 그놈의 것 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그 외
다른 곳은 다- 흥정이 업서도 가을이 되면 백화점이 더 번창이다. 사서들고 나아오는 것은 안사도 조흘 것 가튼 것을 보아서 아즉도 돈이 업단 타령하고는 딴판인지 모르나 백화점 승상긔 바람에 억개가 읏슥하니 백화점 출근을 하는 것인지 자식색기는 겨울이라도 뱃택이를 내노코 다니게 하고 코하나 씩기지 안으면서 주렁주렁 사들고 다니는 것이 그 무엔고 승강긔에 밋첫거든 아조 천국으로 이사를 가든지 백화점 상층 식당에서야만 애인을 맛날텐면 천국에서 사랑을 맷든지……. -조선일보 1933년 10월 29일자
서울시내 어린이들은 지난 6월과 7일, 파리 박멸의 달을 맞아 성냥갑 1만 7465통이나 되는 수의 파리를 잡음으로써 파리 잡기 운동에 크게 앞장 섰다. 이러한 파리 잡기 운동은 서울특별시 위생과가 주동이 되어 각 구 보건소 단위로 실시하였는데, 파리 1통을 잡아오면 '시계 추첨권'을 하나씩 나누어줌으로써 이 운동을 더욱 열이 높게 하였다. 이 중에서 파리를 제일 많이 잡은 지역의 어린이는 성북구의 어린이들로 모두 3607통을 잡았으며, 그 다음은 서대문 어린이가 2924통, 마포구 어린이가 2853통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서울의 전체 어린이가 잡은 파리의 수를 계산해본다면, 성냥 1곽에 평균 200여 마리가 들어 있어 1만 7465곽에 들어 있는 파리의 수는 약 350만 마리나 된다. - 소년한국일보, 1960년 8월 29일자
서울의 봄 거리 세기말적 퇴폐의 거리! 안국동 네거리를 활개 치며 내닫는 '모던뽀이'와 '모던껄'. 햇빛에 번쩍이는 복사빛 파라솔과 봄바람에 날리는 노란빛 넥타이. 그리고 구두 뒤축에 질겅질겅 씹히는 '곤세루' 바지와 정강이 위에 펄렁이는 '사지' 치마. 급한 일이나 있는 것같이 부리나케 달아나는 '뽀이'의 손에는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바이올린이 앞뒤로 왔다 갔다. 황새 같은 '뽀이'를 따라가려고 아기죽거리는 '껄'의 손에는 오페라 복수가 대롱대롱. "아이 좀, 천천히 가요." 따라가지 못해 숨이 턱에 닿아서 쌕쌕거리는 '껄'의 원망하는 소리. "누가 그렇게 느리게 걸어갑디까, 히히히." 그래도 모자를 벗어서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씻는 '뽀이'. "어이 참 더운걸." 종로를 지나 동쪽으로 내려와서 덕원빌딩으로 꺾이어 '혼부라'(일본인들이 주로 사는 번화가인 충무로와 미쓰코시 백화점 근처, 즉 혼마치 일대를 돌아다니는 것)를 하고 다시 조선은행 앞으로 나와 종로 덕원빌딩 뺑뺑뺑. "저 연놈들이 왜 저렇게 부리나케 여기를 지나다니나 벌써 몇 번째야 대관절." "요새 사람들은 저렇게 다녀야 밥이 내린다오." 한 시 두 시 세 시 네 시... "아이고 배고파.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참 네 시일세." 놀란 듯이 머리 긁는 '뽀이'. "무거운데 왜 바이올린은 들고 다녀요, 할 줄도 모르면서." "쉬쉬 에잇 창피하게. 그런데 왜 당신은 복수를 들고 다니오." 이 시대의 젊은이를 상징하는 남녀는 다시 안국동으로 들어섰다. 오, 세기말적 퇴폐! - 동아일보, 1928년 4월 19일자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를 다닌 사람들은 아직도 가끔 동숭동캠퍼스의 향수에 젖는다. 시계탑 앞 잔디에 누워 맞았던 햇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띤 토론을 버리던 마로니에 그늘, 모차르트 40번을 들으며 모닝커피를 마시던 학림다방, 학생증 맡기고 외상을 긁었던 튀김 집이나 자장면 집 진아춘璡雅春의 낭만을 말한다. 또 낡은 가방에 모자를 쓴 꼭 고물장수 같았던 노 교수님이 가끔씩 허리 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꾸부정한 채 길을 따라 오시던 모습을 되살린다. - 김종서, 대학신문, 2003년 9월 6일자
서울대는 캠퍼스 종합화 계획에 따라 1975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전했다. 캠퍼스가 흩어져 있어 비효율적인 점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서울시내에서 데모가 빈발하자 정부가 당시로서는 외딴 곳인 관악산 기슭으로 옮겼다는 설이 있었다. 1975년 1월 17일 오전 9시, 문리대 과학관 407호 강의실에서 동숭동캠퍼스에서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됐다. 29년 동안 캠퍼스를 지켜온 화학과 최규원 교수는 25평 남짓한 강의실에서 강의를 마친 뒤 "이제 동숭동캠퍼스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다시 못 올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1가에는 피맛避馬골이 있다. 고관대작들이 종로의 넓은 길을 말을 타고 다니므로 이를 피해 서민들이 다니던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민들의 통행이 잦았던 피맛골에는 목로주점과 선술집이 자연스럽게 많이 생겼다. 서울 당주동, 청진동, 무교동, 종로2가, 종로4가, 을지로2가 등에도 목로주점들이 모여 있었다.
1970년대 3대 요정은 삼청각, 다원각, 청운각이었다. 그 중에서도 요정정치의 상징은 삼청각이었다. 1972년 서울 성북동에 세워진 삼청각은 여야 고위 정치인의 회동 장소로는 물론이고 남북 비밀협상과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 손님이 줄어 일반 음식점으로 바뀌었다가 서울시에서 인수해 전통 음식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삼청각 근처에 있는 대원각도 최고의 요정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주인이던 김영한 할머니가 법정스님에게 땅과 건물 전체를 시주해 길상사로 바뀌었다. 또 선운각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회 장소로 이용했고, 외국 원수들도 이곳에서 대접을 받기도 했다. 1970년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정인숙은 선운각의 얼굴마담이었다.
혼마치(충무로)는 진고개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된 이후로 번화가가 된 곳이다. 고가네마치(을지로), 메이지마치(명동)와 함께 경성 내 3대 일본인 상점가 가운데 하나였다.
민중화의 시대다. 학문도 민중화, 정치도 민중화, 모두가 다 민중화하는 이 시대이니 어찌 기생이라고 민중화가 아니되랴. 옛날은 관기라 하야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든 기생이 일조에 양반정치가 끊어지고 섬 건너 양반 정치가 된 뒤로 아주 철저히 민중화가 되어 인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젔으면 일류 명기를 하루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잇게 되었다. - 한청산, '기생 철폐론', 월간 <동광>, 1931년 12월, p 56.
기생들의 삶은 갑오개혁 이후 고달퍼졌다. 왕실이 재정적인 유로 약 300명의 경기京妓를 해고했고 기생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양반 세력도 가파르게 기울어갔기 때문이다. 기생들은 1패稗, 2패, 3패로 나뉘어 살아남기 경쟁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1패는 궁중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일급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면서 은밀히 매음도 하는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를 부르는 말이었다. 3패는 술좌석에서 잡가나 부르며 매음하던 탑앙모리를 통칭했다.
1936년 6월 현재 경성에 조선권번, 한양권번, 종로권번 등 권번당 500명씩 모두 1,5000여 명의 기생이 있었다. - 낭낭공자, '명기영화사', 월간 <삼천리>, 1936년 6월, p.495.
고무신들이 하나같이 내구성을 강조한 것은 막강한 경쟁 상대인 짚신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너무도 잘 닳았다. 한 사람이 일년에 70켤레를 신었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편치 않았고 비만 오면 스펀지처럼 물기를 빨아들여 축축한 데다 쇠망치처럼 무거워졌다. 반면 고무신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종이나 마로 만든 미투리와 견주어도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비가 와도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겉모양도 특수층이나 신던 갖신, 비단신과 비슷한 데다 가볍고 착용감까지 좋았다.
순이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신만 신었다 벗었다 하였다. 신코가 뾰족한 것도 신기스럽거니와 휘어잡으면 한 옴큼 되었다가도 손을 놓으면 팔딱 제모양대로 돌아지는 것이 퍽은 재미스럽다. 순이는 버선 위에도 신어보고 맨발에도 신어보았다. 그는 참말 별안간에 하늘에 올라간 것만치나 기뻤다. 이런 신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신을 것이 못 되어 보였다. 아랫마을에도 흰 고무신 신은 여편네라고는 구장댁 한 사람뿐인 것만 보아도 알 것이라고 순이는 등잔을 끄고 그만 자리라고 자리에 누웠다가도 다시 불을 켜고는 고무신을 어루만져 본다. - 정비석, 성황당, 조선일보, 1937
인천부 사동 전석현의 처 문의성은 몃해 전부터 매독을 올니어 고통하든 중 인육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듯고 금년 삼월십사일 오전 한시에 리보현을 식히어 한지면 리태원 공동묘디에 파무든 간동 일백륙번디에 살든 김긔원이란 녀자의 시톄를 파내이어 다리의 살을 베이어다가 시내 장사동 문룡운의 집에서 바다 먹고 그 보수로 돈 이십오원을 주엇는대 매독은 낫지 아니하고 범죄는 발각되여 오래 동안 검사국에서 취조를 밧더니 근일 공판에 붓치어 세 명은 모다 문묘발굴사톄 방기 등 죄명으로 경성디방 법원에서 심리중이라더라. - 동아일보, 1922년 8월 20일
경중京中에 사람을 죽여 담膽을 빼는 자 심히 많았다. 더러는 잡혀 죄를 받은 자도 있었다. 이때 사람들 술 마시길 좋아하고 색을 즐겨 많이 음창陰瘡에 걸려 있었다. 한 의관이 말을 퍼뜨리길 사람의 담이 이 음창에 좋다 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은 끔찍한 변이 잇달은 것이다. 이전에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阮 홍제원弘濟阮 그리고 종루鐘樓 등 앞에는 거지들이 극히 많았던 것인데 사오 년래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음은 바로 사람의 담이 소용되는 자들이 죽였기 때문이다. 거지들이 없어지자 이제 어린이를 꾀어 담을 떼었다. 그러기에 잃은 아이들이 꽤 많아졌다. - 이규태, 버선발에 양구두
일제 강점기의 성병 보균자 수는 충분히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 한 의사는 '30세 내외의 남자로서 성병 없는 사람이 5할 가량밖에 아니된다'고 할 정도였다. 또 어느 병원은 '병자 100명에 12명 정도가 매독환자'라고 밝힐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조선총독부 경찰국 위생과장 서구西龜는 화류병을 '문명의 병' 이라면서 '조선의 장년자 중 50%가 성병에 걸렸으니 조선도 이제 문명국이 됐다.'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중략) 1906년 2월 6일, 몸 파는 창기 139명을 대상으로 국가가 처음 실시한 성병 검사에서도 47명이 병에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1927년 경성부가 공창公娼을 검사했을 때 역시 45%가 매독환자였고 임질은 없는 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략) 해방 직후의 신문들은 남한에만 10만 명 이상의 성병 환자가 있다는 둥, 인구의 약 10% 이상이 매독에 걸렸다는 둥 일관성 없는 기사를 내놓았다. 1947년 9월 현재 서울시 보건위생국의 검진결과에 따르면 기생 여급 등 총 수진자의 43%가 성병 보균자로 판명됐으니 심각한 수준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까지도 도시의 뒷골목 담장이나 전봇대에는 매독ㆍ임질을 치료해준다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군 6,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면서 매춘업은 크게 확산됐다. 대규모 병력이 상주하게 되자 군을 상대하는 민수기업들이 늘었고 군과 기업의 독신남을 노리는 매춘업자들도 덩달아 증가했다. 대좌부(방을 일컫는 좌부를 빌려주는 대좌부貸座敷는 사창업 또는 매춘업을 뜻한다), 석대업席貸業, 특별요리점, 예ㆍ창기업 등 매음 관련업이 번창한 것이다.
소금 한 말에 이원 이십전! 농강에서는 단번에 한 말을 사보지 못한다. 그러니 한근 두근 극상 많이 산대야 사오근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장 같은 것도 단번에 담그지를 못하고 소금 생기는 대로 담그다가도 어떤 때는 메주만 썩여서 장이라고 먹곤 하였다. - 강경애, 소금
해방은 됐지만 조선 사람들의 혀까지 아지노모도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아지노모도에 입맛을 들인 부유층은 줄기차게 밀수된 아지노모도를 찾았다. 밀수되는 양이 워낙 적었고 값도 비싸 서민들은 사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아지노모도를 반찬에 뿌리고, 왜간장에 밥을 비벼먹는 것은 상당한 미식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일제 침략기에 초콜릿은 과자가 아니었다. 에너지의 근원 즉 첨단 영양제였다. '고가인 자양 강장제보다도 간이하고 염가인 영양 식료'가 바로 초콜릿이었다. 일본 최고 제과업체 모리나가는 1928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밀크 초콜릿을 광고하면서 열량부터 내세웠다. '계란 우유의 3배인 2,160 칼로리.'
러시아 공사 부인이 명성황후에게 진상한 양과자 중에는 저고령당貯古齡糖, 즉 초콜릿도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도 왕궁을 드나들 때마다 임금을 에워싼 상궁들을 회유하려고 저고령당을 비롯해 양과자, 왜과자를 선물했다니 여성의 마음을 녹이는 데 요긴했던 것 같다. 양과자는 궁중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고종은 특히 아관파천 후 단 과자를 즐겼다. 러시아 외교사절이 캔디를, 일본인들이 과자(센베이)를 갖다바쳐 북당남과北糖南菓가 나라 망친다는 말이 들 정도였다.
당시 과자는 신문광고에 소개된 공장 생산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항 후 일본의 가내 수공업식 소규모 과자업체들이 잇따라 들어오면서 일본 과자들이 선보였다. 일본인들이 몰려살던 진고개 일대를 중심으로 알사탕과 과자류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꿀보다 더 단 진고개 사탕'이라는 유행어가 나왔고 모찌떡, 밤과자, 센베이, 요깡, 카스테라 같은 과자가 인기를 끌었다.
1940년, 그러니까 해방을 불과 5년 앞두고 시행된 창씨개명 정책은 한반도에서 거대한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전병하田炳夏란 어느 농부의 사례를 보자. 전씨 성을 가진 이 농부는 성을 전농田農으로, 이름은 병하丙下로 바꿨다. 성과 이름을 일본 발음으로 부르니 덴노 헤이카가 됐다. 개성 송도중학교 교사였던 이영철이란 사람은 창씨를 아예 '가나다加那多'로 했다.
영화가 한반도에서 근대의 총아로 자리잡기까지 변사의 역할은 대단했다. 스크린, 배우, 악단, 관객을 통솔해가며 영화 문화를 이끌어 간 것이 변사다. (중략) 영화의 내용과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업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분위기 띄우는 일이었다. 악대의 연주가 흘러나오면 변사는 모닝코트나 프록코트를 입고 박자에 맞춰 뿡뿡이 춤을 추며 등장했다. 관객의 흥미를 끌자면 우스개도 필수였는데 말재주에 따라 관객 수가 오락가락했다. 광고에서 아무개 변사 독연獨演이라는 글자가 주연배우 이름보다 크게 날 정도였다.
1922년 경성에서 상영된 활동 사진의 흥행일수는 2,566일에 관객수는 96년 1,532명이나 됐다. 경성 인구를 26만으로 잡으면 1인당 4일에 한 번꼴로 영화를 본 셈이다. 전쟁에 돌입한 1942년의 통계치를 봐도 경성 사람들 100명 중 72명이 1개월에 한 번꼴로 영화관을 찾았으니 가히 영화의 전성시대라 할 만 했다.
조선에서 자동차를 가장 먼저 사용한 곳은 황실이다. 일제는 황실의 원한과 울분을 달래기 위해 자동차를 선물했다. 하지만 황제가 타고다니는 걸 목격하기는 어려웠다. 국권을 잃은 처지여서 바깥 나들이를 최소화한 데다 서양 문물에 반감을 갖고 있는 민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자동차 타는 것을 삼갔다. '궁궐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 스스로 달려가는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 걸 보면 궐내에서 맴을 돌듯 자동차를 타지 않았나 싶다.
1925년 포드의 서울 지사는 전면광고를 내고 바둑알만한 글씨로 차 값을 소개했다. 5인승 상자형 쎄단은 3,160원, 2인승 상자형 쿠페는 2,825원, 토링카 1,600~1,850원, 로드스터 1,540~1,760원... (중략) 1930년대에는 포드의 택시가 2,900원, 버스가 3,900원, 트럭이 3,100원선이었다. 중견사원의 월급이 150원이었으니 승용차 한 대 사려면 2년치 연봉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략) 택시는 처음엔 시간당 5원을 받다가 점차 인하해 1928년 경성 일원의 택시 요금은 4인 기준에 1원이었다. 승객이 한 사람 추가될 때마다 20전을 더 받았고 교외로 벗어나면 별도의 요금이 붙었다. 경성을 한 바퀴 도는 데 3원, 1시간 대절하는 데 5~6원을 받았다. 당시 쌀 한 가마가 6~7원이었으니 서민들은 택시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택시 요금은 1931년 말 80전으로 싸졌으나 5전짜리 전차에 비하면 16배나 비쌌다.
당시 경성에서 드라이브할 만한 코스는 두 곳밖에 없었다. 손님이 '전선주 베러 가자'고 하면 한강 철교 쪽으로 가자는 소리였다. 죽 늘어서 있는 전신주 사이를 S자형으로 꼬불꼬불 빠져나가는 것으로 승객의 흥을 돋웠다. '오즘고개로 가자'고 하면 정릉을 거쳐 청량리 쪽으로 가자는 말이었다. 서대문 악박골 약수터에 들러 엿을 사먹고 약주 몇 사발에 굴비를 뜯은 후 정릉 아리랑 고개를 지나 능수버들 늘어진 청량리 가도를 달리는 코스였다.
버스의 진정한 명물은 버스도, 운전수도 아니었다. 단정하게 유니폼을 입은 여 차장이었다. TV 탤런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여 차장은 어느 노선의 아무개라는 식으로 얼굴과 이름이 팔렸다. 경성제국대 학생들의 연애 상대가 되기도 했던 여 차장은 인기도에 따라 승객 수를 좌지우지했다.
한국어 방송의 대종을 이루었던 연예 부문은 남도 소리, 가야금 병창, 가곡, 민요, 가사 등 전통음악으로 채웠다. 전통음악을 제대로 전수받은 음악가는 기생들뿐이어서 방송 출연이 잦았다. 몇몇 손님들 앞에서만 연주하던 기생들이 라디오가 나타나면서 바야흐로 대중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비누가 들어오기 전에 사람들은 수세미, 오이, 박 등의 줄기를 잘라 거기서 나오는 즙이나 수분을 사용했다. 팥, 녹두 등을 맷돌에 간 후 보드라운 체로 쳐서 가루 형태로 쓰기도 했다. 날 비린내가 나는 이런 가루는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고 해서 비루飛陋라 불렀다. 비누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쌀겨도 비누 구실을 톡톡히 했다. 고운 쌀겨를 무명 주머니에 담아 손이나 얼굴을 문지른 다음 물로 닦아냈다. 소설에서 종종 살결 고운 여자는 방앗간 집 딸로 설정되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땅에 처음 비누가 들어온 것은 개항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사보나 지방에서 가져왔다고 해서 '샤봉'으로 불렀는데, 훗날 비누를 '사분'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광고에서 신경이 쓰이는 대목은 '매주 한 번은 머리 감기를 잊지 마시라'는 주문이다. 당시엔 한 주에 한 번씩도 머리를 감지 않았다는 얘긴데 너무 찝찝해하진 마시길 바란다. 오줌을 받아놨다가 머리 감는 사람들도 적잖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샴푸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 여성들은 창포를 썼다. 창포는 향기 좋고 모발에 윤기를 돌게 하는 천연 샴푸였다. 하지만 귀해서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조선 팔도에 창포 가루 한 홉으로 유혹하면 문턱 넘어오지 않을 기생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부릿가루를 섞은 가짜 창포 가루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충무로의 원래 지명이 진고개 였다고 해요. 일제시대 때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혼마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지만 원래는 남산골의 일부로 비만 내리면 길이 질어서 걸을 수가 없다고 해서 진고개라 불리웠답니다. 일제시대에는 한국상인들 중심의 종로통, 그리고 진고개와 남대문에 이르는 일본인 상가, 소곡동 일대의 청인 상가가 도심의 중심을 이루었다죠. 중구라는 지명도 일본인들이 점점 세를 확장하면서 자기들이 사는 곳이 서울의 중심이다 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하는군요. 광복 후에 일본식 이름을 우리나라식으로 바꾸면서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서 특별히 우리나라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을 따서 충무로가 되었다 합니다. - 충무로 - 진고개, 마야의 놀이터
구한말에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인 남촌이 형성된 배경은 일본인의 서울거주가 시작된 초기인 1885년에 일본공사관이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그에 인접한 진고개 일대, 즉 오늘날 중구 예장동·주자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지정한데서부터 비롯된다. 근등(近藤) 일본대리공사가 김윤식(金允植) 외부독판에게 요청하여 상호 협의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1885년 이후 일본상인들이 진고개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거래를 시작하였다. 한국정부가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상인에게 개시(開市)를 허락한 곳은 양화진이었고, 그 뒤 개시장(開市場)을 용산으로 옮겼으나 일본상인들은 용산에는 별로 모여들지 않고 진고개에 즐겨 자리를 잡았다. - 진고개(泥峴), 달하 노피곰 도드샤
과거는 눈물과 같다고 한다. 눈물을 닦아야 앞이 보이는 것처럼 과거를 잊어야 미래를 또렷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 '미래 지향적으로 살자.'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과거를 잊으려 한다. '과거 있는 여자', '과거사', '과거 청산'... 이런 말에서 보듯이 과거라는 말의 느낌은 '음산하고 고통스러운 것' 이다. 사실 우리의 과거는 불행했다. 가난은 숙명처럼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힘든 시절이었다. 지난 시절, 삶의 목적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얼어 죽지 않고 굶어 죽지 않아야 했다. 이제 음습한 과거의 꺼풀을 벗겨내고 애틋하면서도 환한 속내를 펼쳐 보이려 한다.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세월은 추하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추억으로 바꿔준다. 과거는 잊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지난 삶은 밝은 추억으로 곱게 되새겨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 손정진,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사진으로 만나는 근대풍경
- 15. 화학조미료 : 제국의 맛, 아지노모도. 소금도 설탕도 아닌 이 하얀 가루가 뭘꼬?
- 16. 공창 : '성매매산업' 시초가 된 일제의 '근대적' 공창
- 17. 어린이 :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 18. 영어 : 今也 英語 인푸레詩代
- 19. 박가분 : 회박 쓴 얼굴에 쥐 잡아 먹은 입술이라... '양장에 꼭 맞는 화장' 권하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