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sades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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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Middle Ages


수도원이 청빈을 미덕으로 삼고 신에게 평생을 바친 수도사들이 기도와 노동에 몰두하며 조용히 나날을 보내는 종교 시설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중세의 수도원은 아니다. 중세에 좋든 나쁘든 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게 된 수도원은 그 지방의 주교와 봉건영주도 손을 댈 수 없었고, 오직 로마 교황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따라서 수도원은 사실상 독립한 종교 조직이었다. 우선 수도원은 도시의 성벽 밖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이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는 수도원이 없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재산을 기부하거나 유언으로 증여하기 때문에 넓은 경작지를 소유하고, 거기에서 나는 수확물을 팔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세속의 사람들과 충분히 교류하고 있었다. - 66 ~ 67 page[1]

하지만 해적업이 산업으로 성공하자 다른 산업에 쏟는 관심과 에너지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시대에도, 로마제국에 편입된 시대에도, 북아프리카 일대는 풍요로운 경작지대였다. 로마제국의 곡창이라고 불리기까지 했고, 고대에는 농산물 수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중세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서, 습격하러 간 곳에서 밀 같은 농산물까지 빼앗게 된다. 갓 수확한 농작물까지 빼앗겨버리는 쪽도 딱하지만, 밀처럼 부피만 크고 값싼 물건까지 빼앗아야 했나 하고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은 해적업에 의지하는 생활방식으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긴 안목으로 보면 지중해 남쪽에 사는 사람들을 조금씩 좀먹는 요인이 된다. - 106 ~ 107 page[1]

The restored Abbey of Monte Cassino.

그후 반년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2]을 공격하고 싶어하는 이슬람 쪽과 그것을 방위하기 위해 단결한 기독교 쪽이 남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이 수도원을 둘러싸고 벌인 육상전으로 지나갔다. - 124 page[1]

남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원은 성 베네딕투스가 창설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산 위에 있어 충분히 방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이 수도원도 금화 3천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치르고 불타는 것을 면했다. - 137 page[1]

오늘날 이탈리아의 해군기는 중세 후기의 지중해 세계에서 이슬람 해적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해상 전력이었던 이탈리아의 네 해양국가의 국기를 로프로 둘러싼 도안이다. 상단 왼쪽이 베네치아, 오른쪽이 제노바, 하단 왼쪽이 아말피, 오른쪽이 피사의 국기다. 이들은 모두 해외 교역으로 힘을 키우고 재력을 쌓은 소수의 상인들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과두제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의 공화국'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이들이 해상세력으로 대두한 순서는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의 차례일 것이다. 왜 이런 순서가 될까 생각했지만, 지도에서 각 도시의 위치를 보자 납득이 갔다. - 134 ~ 135 page[1]

사람들이 바닷가를 버리고 안주할 땅을 찾아 깎아지른 벼랑 위나 산속 깊숙한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오늘날에도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높은 벼랑 위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도시나 마을을 자주 볼 수 있다. 역사를 모르면 왜 일부러 저렇게 불편한 곳에 살고 있을까 생각할 뿐이지만, 중세 전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필사적이었다. - 137 page[1]

이런 해변 도시들에서는 1천 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수호성인의 상을 앞세워 시내를 누비는 축제가 벌어진다. 서민이 주역인 이 축제들은 대부분 사라센 해적과 관계가 있다. 또한 축제 자체가 여름철에 집중되어 있다. 북아프리카의 해적은 여름철에 자주 부는 리베초(남서풍)나 시로코(남동풍)를 타고 습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지중해의 조류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접근해온 사라센 선단이 갑자기 방향이 바뀐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벼랑에 부딪혀 침몰한 뒤 바다 위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느니, 성 니콜라가 탑 위에서 졸고 있던 파수꾼을 깨워주었기 때문에 시내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한 곳까지 대피할 수 있었다느니, 수호성인의 유래는 곳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모두 사라센 해적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 144 ~ 145 page[1]

고대 그리스인의 식민도시로 태어나 아테네가 적대시했을 만큼 강국으로 번영을 누렸고, 플라톤이 찾아가고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난 시라쿠사도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 159 page[1]

사르데냐에서는 요트나 해수욕이 주된 즐거움이지만, 시칠리아에서는 지금도 각지에 남아 있는 2천여 년 전의 유적에서 시작하여, 그후에도 이 섬이 거쳐온 시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교회나 시청, 궁전이나 별장을 구경하고 다니는 즐거움도 추가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역사가 두꺼운 것이 시칠리아다. 사르데냐는 그 점에서는 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그리스인이 시라쿠사를 건설한 연대는 기원전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역사의 두께는 긴 세월 동안 축적된 인간의 기능 수준이라든가 이 시대에 특히 중요했던 항구나 조선소 건설과 정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박 건조와 선원의 기능에서 그 본령을 발휘헌다. 시칠리아를 영유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시칠리아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르데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 163 page[1]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시칠리아도 본국에 농산물을 수출했지만, 같은 시대 튀니지의 중요성은 시칠리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고대에 아프리카라면 튀니지를 의미했을 정도였고, 이 시대의 튀니지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농업과 통상, 그리고 특히 아프리카 오지에서 실려오는 황금 때문에 북아프리카 전체의 핵심으로 여겨질 만한 가치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 말기에 북방 야만족인 반달족에게 정복되었고, 그후로는 비잔티움제국의 악정이 계속되다가 서기 7세기에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적인 사고방식도 죽었지만, 제국의 곡창이라고 불릴만큼 번성했던 농업도 죽어버렸다. 이 튀니지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일대가 해적의 소굴이 된 것은 주민들이 먹고 살 길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117 ~ 118 page[1]

이슬람교에는 원래 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슬람의 집'이라는 개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국가 개념이 없는 경우, 곤란한 점이 하나 있다.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란도 동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사유재산을 보유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자카트(zakat)라는 이름으로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세금인데, 그것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사람이 굶어죽는 것을 방치했을 때 유복한 사람이 느끼게 될 회한의 정을 씻기 위해" 지갑끈을 푸는 것이 자카트다. (...) 하지만 무함마드는 또 다른 세금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패배자, 즉 피지배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이다. 이 세금은 정복자인 이슬람교도의 보호를 받고 이슬람 세계에서도 자기가 믿는 종교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대가로 자신의 수익이나 수입의 절반을 내도록 정해져 있었다. 이슬람식으로 말하면 '이슬람의 집' 안에서 비이슬람교도의 존재를 '참고 견디는 대가'가 된다. 그런데 세율이 50퍼센트라면 비인간적으로 높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중세 전기인 이 시대에는 반드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로마제국에도 피지배자에게 부과된 속주세가 있었는데, 세율은 10퍼센트였다. 하지만 중세의 봉건영주나 대지주였던 수도원에 소작인이 낸 소작료는 토지 소유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50퍼센트를 훨씬 넘는 액수였다. 고대에는 '넓고 얕게'였던 세제가 중세에는 '좁고 깊게'로 바뀌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중세에는 성직자를 비롯한 면세 대상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 181 ~ 183 page[1]

Duomo di Siracusa
Monreale Cathedral

아랍 치하에서도 기독교도가 계속 100퍼센트였던 시칠리아 동부를 상징하는 도시 시라쿠사의 두오모와, 그와는 반대로 노르만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아랍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시칠리아 서부의 몬레알레에 있는 데성당을 둘 다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고개를 끄덕여 줄 게 분명하다. 시라쿠사의 대성당인 두오모는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고대 신적이었던 전력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한편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몬레알레의 대성당은 모자이크로 된 그리스도가 아무리 정면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어도 교회 전체의 장식에 나타난 짙은 아랍 색채를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다. 유명한 회랑은 아랍 그 자체다. 노르만 왕들은 교회를 세우기를 바랐는데, 시칠리아의 이슬람교도들이 그 건설 공사에 전면적으로 협력한 결과다. (...) 주요한 원정만 여덟 차례를 헤아리는 십자군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교도를 죽이지 않고 성지 예루살렘을 손에 넣은 사람이 있다. 바로 노르만 왕조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2세다. 이 사람은 노르만인과 독일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태어나서 자란 곳은 시칠리아였다. 그는 문명사가인 부르크하르트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평한 인물인데, 지금까지기술해온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이슬람 지도앚와의 평화적인 교섭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프리드리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후기의 지중해 세계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도 이 사람이 통치하고 있던 시기의 팔레르모에서 점화되었다. - 196 ~ 199 page[1]

게다가 시대는 서기 900년대였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지 1천 년째 되는 해에 신의 심판이 내린다는 생각이 있다. 선량한 기독교도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떠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까. 회개하라고 절규하는 주교나 사제의 목소리다. 이것이 200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이슬람 해적의 습격으로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사람들까지 쥐어짜려고 해도 더 이상 쥐어짤 수 없는 상태에서도 주교나 사제의 말대로 돈을 내어 비잔티움 금화 2만 2천 냥을 모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 211 page[1]

서기 975년에 그때까지 오랫동안 사라센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던 생트로페에서 이슬람 해적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이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은 프랑스에서 로마로 가고 있던 클뤼니 수도원장 일행이 도중에 생트로페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아 몽땅 털리는 불상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왕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던 사람은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쌍벽을 이루는 클뤼니 대수도원의 원장이었다. - 217 ~ 218 page[1]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아말피와 피사와 제노바는 상선단에 호송선단을 딸려서 내보내는 일은 거의 없고, 이들 세 나라의 해군력은 호송선단으로 이용되기보다는 독립된 해군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사라센 해적선단을 추적하여 격파함으로써 자국의 통상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반대로 베네치아 주식회사라는 느낌이 강했던 집단행동형의 베네치아공화국은 오로지 호송선단 방식을 취했고, 사라센 해적에 대해서는 직접 공격당하지 않는 한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았다. 상선단에 호송 선단을 딸려 보내면 비용이 늘어나지만, 그것은 이 상선단이 실어 나르는 화물을 고급화하는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이 베네치아의 방식이었다. 베네치아가 오리엔트와의 교역을 중요시한 것도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219 ~ 220 page[1]

그해 겨울, 무세토의 사절이라는 인물이 로마교황청을 찾아왔다. 사절은 그를 맞이한 교황 앞에 자기가 가져온 커다란 자루 속에 든 것을 모조리 쏟아놓았다. 자루에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은 알밤이었다. 무세토의 사절은 교황에게 주인의 말을 전했다. "내년 이른 봄에 루미(이탈리아 거주 기독교도)들이 사는 곳에 이만한 수의 사라센인이 밀어닥칠 거요." 교황 베네딕토 8세는 안색 하나 변치 않았다. 시종에게 귀엣말을 하고, 그 시종이 가져온 커다란 자루에 든 것을 사절 앞에 쏟아놓으며 말했다. 자루에는 수많은 밀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네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이만한 수의 루미가 무세토와 그 부하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중세에는 교황도 배짱이 없이는 해낼 수 없었다. - 224 page[1]

중국인이 발명해놓고도 중국인 자신이 잊고 있었던 나침반은 그 유효성을 알아차린 아랍 상인을 통해 중근동에 전해진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사막을 여행하는 것은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랍인을 통해 이것을 알고 소형으로 다시 만들어 휴대용 나침반으로 팔기 시작한 것은 아말피의 상인이었다. 휴대용 나침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탈리아의 각 지방에서 양산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이탈리아 선원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아랍인에게도 팔았다니까 감탄할 수밖에 없다.

종이도 유리도 인쇄술도 베네치아인이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기업화되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지 20년도 지나기 전에 베네치아인은 출판업에 나선다.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베네치아가 유럽 제일의 출판왕국이 되어 있었다. 로마숫자에 비해 아라비아숫자는 쓸 때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적다. 그리고 '0'이라는 개념도 있다. 이것을 유럽에 들여온 것은 피사의 교역상인이지만, 이 편리한 숫자는 당장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고 베네치아에서는 아이들한테 이것을 가르치는 학교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또한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되자, 피사에서 피렌체로 가는 길에 있는 프라토라는 도시의 상인이 부기도 발명했다. 그러자 당장 여기에 주목한 베네치아인은 그것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복식부기로 완성시키기까지 했다. 복식부기가 된 뒤 비로소 많은 지역에 퍼져 있는 판매망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항해에는 해도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아무도 의심치 않는 사실이지만, 이것을 발명한 사람도 이탈리아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고 더 세밀하고 종이 한 장에 더 많은 정보를 담은 해도로 발전시킨 것은 피사의 선원들이었다. 그리고 피사가 경쟁관계인 제노바에 패하여 해양도시국가에서 탈락하자, 이 기술은 베네치아인의 기업화를 거쳐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중세 말기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로 접어드는 동안 선원들은 베네치아제 해도가 없으면 바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 당연해진다. 전체와 함께 그 일부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지도와 해도가 최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286 ~ 287 page[1]

Crusades


References

  1.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상),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2.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Tj4&articleno=13879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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